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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지소개

경산도 지역의 순교사와 남쪽 지방의 신앙 전파

한국 최초의 신앙 공동체 형성(1784년 가을)

서울 을지로[장악원] 부근의 김범우 토마스 집에서 신자들이 첫 모임을 가졌다.

경상도 지방 최초의 신앙 공동체 형성(1798년)

황사영 알렉시오가 예천에 갔을 때와 황일광 시몬이 경상도에 갔을 때 신자들이 있었고, 김종한 안드레아는 영양 일월산 우련전에서 신앙생활을 했다.

신유박해로 신자 71명의 경상도 유배(1801년)

신유박해 때 잡힌 신자 71명이 경상도로 유배를 왔고, 흥해 지역으로 유배 온 최해두는 ‘자책’을 저술했다.

경상도 최초의 박해인 을해박해(1815년)

청송 노래산, 진보 머루산, 영양 일월산 곧은정과 우련전에 살던 신자들이 잡혀 경주 진영과 안동 관아로 끌려갔으며, 신앙을 지킨 신자들은 경상감영에서 감옥살이를 하다가 죽거나 관덕당 형장에서 참수 당했다.

정해박해에서 기해박해까지 이어진 순교(1827년~1839년)

정해박해 때 신자들은 상주 멍에목과 앵무당, 순흥 곰직이에서 잡히거나 안동 관아에 자수했고, 신앙을 지킨 신자들은 경상감영에 끌려와서 감옥살이를 하다가 죽거나 관덕당 형장에서 참수 당했다.

조선대목구 설정(1831년 9월 9일)

아시아 포교를 위해 프랑스에 설립된 해외전교단체인 파리외방전교회에서 관할하는 조선대목구가 설정됐으며 초대감목으로 브뤼기에르 주교가 임명됐다.

샤스탕 신부의 남쪽 지방 사목(1838년~1839년)

앵베르 주교, 모방 신부와 더불어 1836년 12월 31일 조선에 입국한 샤스탕 신부는 최초로 남쪽 지방의 전교를 맡았다. 신자들을 찾아 사목을 할 때 신나무골을 방문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경상도의 사도 최양업 신부의 활약(1849년~1861년)

1849년 상하이에서 사제서품을 받고 귀국해 1850년부터 신자들을 사목했다. 충북 진천군 배티를 기반으로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 지방 2,800㎞의 127곳의 공소를 11년 6개월 동안 걸어서 방문했다. 신나무골을 방문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경신박해로 인한 경상도 지역 교우촌의 몰락(1860년)

경신박해가 일어나자 최양업 신부는 간월골 죽림굴에 피신했다. 경상도에서 17명의 신자가 체포됐는데, 신앙을 지킨 10명은 경주감옥에 갇혀 세 차례나 문초를 당했고 대구에서 한 열심한 노파가 순교했다.[최양업 신부 19번째 편지, 1860년 9월 3일] 박해가 끝나자 경상도 지역의 교우촌이 거의 몰락했다.

활발한 한티 교우촌의 다블뤼 주교 방문(1861년 12월)

최양업 신부가 숨을 거둔 뒤, 다블뤼 주교의 사목보고서에 1862년 “칠곡 고을의 굉장히 큰 산 중턱에 아주 외 따른 마을 하나가 있는데 이곳에는 40명가량이 성사를 받았습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 때 신나무골 교우들도 한티로 가서 성사를 받은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병인박해와 한국 교회의 몰락(1866년~1873년)

대원군은 1866년 초 병인박해를 일으켜 선교사 9명은 순교했고 3명은 중국으로 피신했다. 1866년 10월 병인양요(丙寅洋擾)가 일어나자 선참후계(先斬後啓)령이 내려질 정도로 박해는 심각해졌고, 1868년 4월 18일(음) 남연군(南延君) 묘 도굴사건이 일어나자 박해는 혹독해졌다. 1871년 신미양요(辛未洋擾)가 일어나자 척화비(斥和碑)가 세워졌다. 대원군이 1873년 11월 실각하자 8,000명이 넘는 신자들이 순교한 박해는 점차 잦아들었다. 이선이 엘리사벳과 아들 배도령 스테파노는 칠곡 한티 부근에서 1868년[혹 1860년] 2월 8일(음) 순교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병인박해 종결과 성직자들의 조선 재입국(1873년 12월 24일)

고종이 직접 정치를 하기 시작하면서 병인박해가 종결되자, 백령도를 거쳐 장연을 통해 성직자들의 재입국이 비밀리에 이루어졌다. 1876년 5월 10일 블랑 신부와 드게트 신부, 1877년 9월 23일 리델 주교와 로베르 신부와 두세 신부가 들어왔다.

로베르 신부의 신나무골 정착(1885년 12월)

로베르 신부의 신나무골 정착으로 남쪽 지역 최초로 대구본당이 설정됐다. 1886년 5월 3일 조불수호조약으로 선교사 이동이 자유로워졌다. 1887년 11월 로베르 신부가 대구로 진출하려 새방골로 자리를 옮겼고, 신나무골은 보두네 신부가 맡았다. 하지만 전국에 발생한 천주교와 정부와의 분쟁인 교안(1888~1905)으로 전교는 쉽지 않았다.

로베르 신부의 대구 입성(1891년 4월 30일)

로베르 신부가 대구에서 추방되는 사건이 외교 문제가 됐고, 이를 계기로 선교사 정착이 자유로워졌다. 대구에 입성한 로베르 신부는 계산동에서 사목을 시작했다.

뮈텔 주교의 사목방문(1893년)

뮈텔 주교는 신자를 찾아 사목방문을 하려 전국을 다녔고, 1893년 11월 대구 지역의 계산동, 새방골, 신나무골에 갔다.

로베르 신부의 십자형 기와집 성전 건축과 소실 (1898년 12월 25일~1901년 2월 4일)

로베르 신부는 계산동에 십자형 기와집 성전을 건축하기 전에 대구 대어벌[북성로 19-1]에 임시로 요셉 성당(1896년 5월 31일~1898년 9월)을 마련해 신자들을 사목했다. 십자형 기와집 성전이 지어졌지만 화재로 전소되고 말았다.

대구 지역 교육 사업 추진(1898년 12월 25일)

십자형 기와집 성전이 완공될 때 교육기관 해성재(海星齋)도 같이 지어졌다. 1901년 5월 27일 대구 지역에 한국인 김성학 신부가 김천에 황금(黃金) 성당을 세울 때 김천 성의(聖義) 학교를 설립했다. 1908년 3월 1일 대구 성립(聖立) 학교가 설립됐다.

벽돌조 대구대성당 축성(1903년 11월 1일)

십자형 기와성당이 화재로 소실되자, 로베르 신부는 프와넬 신부가 설계한 대로 벽돌조 성당을 지었다.

국채보상운동의 전개(1907년 2월)

1905년 11월 17일 을사늑약으로 일본에게 조선의 재정과 외교권을 빼앗겼고, 이를 되찾기 위해 정규옥 바오로가 매입한 광문사[대어벌 요셉 성당 부지]에서 서상돈 아우구스티노를 중심으로 사순시기에 국채보상운동을 전개했다. 하지만 일제의 방해로 운동은 실패했고, 1910년 8월 29일 한일병합늑약(경술국치)이 이루어졌다.

대구대목구 설정(1911년 4월 8일)

전라북도, 전라남도, 제주도, 경상북도, 경상남도를 관할하는 대구대목구가 설정되면서 드망즈 주교가 임명됐다. 드망즈 주교는 1911년 7월 2일 계산 성당에서 처음으로 주일미사를 드리면서 교구를 루르드 성모님께 봉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