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나무골 성지 신나무골성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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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지소개

신나무골 성지 약사

신나무골 교우촌 생성과 성직자 방문

'신나무골' 이란 명칭은 예전에 골짜기에 '신나무'가 많았다고 해서 붙여졌다.
신나무골은 대구 근교의 외진 곳이지만 교통이 편리하고 읍내까지 하루거리밖에 되지 않아 일찍부터 사람들이 모여 살았다. 서울에 살던 김현상 요아킴(金顯祥=金厚祥) 가정이 1837년 신나무골을 잠시 거쳐 갔다는 기록으로 미루어 볼 때, 정확한 가구 수는 알 수가 없지만 그 이전부터 신자들이 살았다.

1838년 12월 1일 앵베르 주교의 편지를 보면 샤스탕 신부의 대구 방문을 추정할 수 있다. “감옥에 갇힌 신앙의 증거자들이 자기 죄를 편지로 신부에게 밝히고 같은 날이나 다음날 감옥 문 앞으로 지나가는 그 신부에게 그가 지나가는 것을 보면서 신부의 신호로 통회하는 마음을 발한다면, 사죄를 받을 수 있는지요? 실제로 남부 지역에서 그해에 (1827년부터) 12년간 감옥에 갇혀 있던 증거자 일곱 명이 큰 기쁨으로 사죄를 받았습니다.” 샤스탕 신부가 대구에 왔을 때, 신나무골에 왔을 가능성이 높다.

1846년 다블뤼 신부가 신나무골을 방문했을 가능성이 있다. 1849년부터 1861년 6월까지 12년 동안 최양업 신부가 경상도 지방을 순회하면서 신나무골에 와서 성사를 주었을 가능성이 많다. 1865년부터 1866년 병인박해 직전까지 리텔 신부가(1870년 주교 서품) 경상도 남쪽 지방을 맡아 순회 전교를 했고, 신나무골에 와서 성사를 주었다.

병인박해 전후의 신나무골 교우촌

1862년 달성군 다사면 부곡리에서 신앙을 받아들인 이이전 안드레아(李以全) 가정이 칠곡군 지천면 웃갓[上枝]에 잠시 머물다가 신나무골로 이사를 왔다. 1866년 병인박해가 일어나자 신나무골 신자들은 사방으로 뿔뿔이 흩어졌다. 1873년 병인박해가 끝나자 흩어졌던 신자들과 새로 입교한 신자들이 신나무골에 모여 교우촌을 이루었다. 1885년경 신나무골에 8~9가구에 36~40명 정도의 신자들이 살았다.

이선이 엘리사벳의 순교

이선이 엘리사벳(李先伊)은 배손이(裵孫伊, 裵正模)와 결혼해 칠곡 골버실[국우동]에 살면서 딸 하나와 아들 도령, 용철, 용덕을 낳았으며, 이 시기에 세례를 받은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1866년 병인박해가 일어나자 신나무골을 거쳐 팔공산 중턱으로 피신했다. 1868년 2월 8일(양 3월 1일) 한티 옹기굴에서 포졸들에게 체포됐다. 포졸들이 심문을 하자 배손이는 배교해 풀려났고, 이선이와 아들 배도령 스테파노는 “죽어도 천주교[聖敎]를 믿겠다.”며 신앙을 고백했다. 포졸들의 심한 매질에도 신앙을 지켰고, 결국 작두날에 목이 잘려 순교했다. 딸은 출가했고, 용철과 용덕은 나이가 어려 심문을 당하지 않았다. 숨어서 순교 상황을 지켜보던 배손이가 이선이와 배도령의 시신을 임시로 한티 뒷산에 묻었다. 얼마 후 이선이의 시신은 칠곡읍 아양동 선산[칠곡IC 뒷산]으로 이장했으나, 미혼인 배도령의 시신은 이장하지 않았다.

초대 로베르 아킬레오 신부 (Achille Paul Robert, 金保祿, 1853~1922)

1882년부터 로베르 신부가 경상도 지방의 선교 책임을 맡아서 경상도 전역과 충청도, 경기도, 강원도 일부, 전라도 일부 지방을 순회 전교했다. 로베르 신부는 이이전 안드레아 집을 매입한 뒤 수리해 사제관으로 만들고, 1885년 12월 대구본당을 설립했다. 서상돈 아우구스티노(徐相燉, 1851~1913)와 사촌 동생 동정녀 서 마리아(1859~1917), 복사 이호연 베드로(李浩然)가 로베르 신부를 도와 신나무골에 상주했다.

“저의 구역은 전라도와 경상도 전역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 저는 갖가지 난관을 이겨내고 마침내 경상도 신자들 사이에 정착했습니다. 주교님도 아시다시피 선교사가 경상도에 사제관을 두는 것은 이번이 처음입니다.”(1886년 4월 21일 칠곡에서 보낸 로베르 신부 사목보고)

※ 연화학당(蓮花學堂) 로베르 신부는 교육 사업에도 관심을 기울여 ‘연화학당’(1886~1894)을 설립했다. 1890년 충주 출신 박상언 요한(朴相彦) 선생이 신나무골로 왔고, 양자(養子) 바실리오와 함께 천자문과 한글을 가르쳤다. 박상언은 생활 형편이 어려워 신나무골을 떠났고, 1894년 28명 학생이 있는 계산동 학교만 남겨 놓고 나머지 학교들을 폐쇄했다. ※ 십자가형 한옥 성당 로베르 신부는 1887년 새방골로, 1891년 계산동으로 이전했다. 그 후 계산동 성당이 비좁아지자 큰 성당을 지을 결심을 했다. 1894년 초부터 성당을 짓기 위해 목재를 구입하고, 1895년 9월 성당 부지의 평탄 작업을 하고, 담장을 쌓았다. 처음에는 계산동에 유럽식 성당을 지으려 했지만 여러 가지 문제로 포기하고 1895년 12월 대어벌에 임시로 ‘성 요셉’성당과 사제관을 마련하고 조선식 성당을 짓기로 계획을 변경했다. 1898년 9월 1일 십자가형 한옥 성당과 사제관을 완공했고, 12월 25일 비에모 신부와 함께 성당을 축성했다. 하지만 1901년 2월 4일 화재로 소실됐다.

2대 보두네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신부 (Francois Xavier Baudounet, 尹沙勿, 1859~1915)

보두네 신부는 신나무골에서 조선말과 풍습을 배우면서 18개월 동안 사목을 했다.
보두네 신부는 1889년 3월 전주 부근 대성동으로 가서 1891년 전동성당을 설립했다.

3대 죠조 신부(Moyse Jozeau, 趙得夏, 1866~1894)

죠조 모세 신부는 조선말과 풍습을 배우면서 1년 동안 신나무골에 상주하면서 성사를 주었다. 죠조 신부는 1890년 부산 영도 조내기로 떠나 부산성당(청학동 본당)을 설립했다.
부산성당은 1900년 초량동을 거쳐 1916년 범일동으로 옮겼다.

뮈텔 주교의 신나무골 공소 방문

사람이 살지 않던 신나무골 초가 사제관이 허물어지기 시작하자, 1893년부터 4칸짜리 20평 초가집을 마련해 공소예절을 드렸다. 1893년 11월 조선대목구장 뮈텔 주교가 경상도 지방을 사목 방문을 해서 신나무골과 장자동에서 견진성사를 주었다. “공소의 방(3칸짜리, 그리고 마루 하나)과 그 이웃집은 학교 선생의 수입원이 되고 있는 논과 함께 교회 소유이다. 학교의 학생 수는 작년에는 4명이었는데 이제는 단 한 명뿐이다. 로베르 신부가 새방골로 가기 전에 2년간 살았던 곳이 여기이다. 로베르 신부의 뒤를 이어 보두네 신부가 18개월을, 그리고 죠조 신부가 1년을 살았다.”(뮈텔주교 일기 1권 1893년 11월 18일)

4대 파이야스 가밀로 신부 (Camillus Cyprien Pailhasse, 河敬朝, 1868~1903)

1894년 파이야스 신부가 조선에 입국하여 신나무골에 왔으며, 1894년 왜관 가실에 집과 전답을 사들여 수리한 후 1895년 2월 가실로 가서 9월에 가실 본당을 설립했다.

신나무골 공소

1895년 신나무골은 가실 본당의 공소가 됐고, 신자들은 열심히 신앙생활을 했다.
[김천에서 대구로 기차를 타고 올 때] “신나무골 앞에 있는 철도 옆 비탈길 위 기차가 지나가는 길에 이 마을의 교우들이 강복을 받기 위해서 무릎을 꿇고 있었다.”(드망즈 주교 일기 1912년 1월 24일) 1926년 왜관 본당이 설립되자 신나무골은 왜관 본당 공소가 됐다.
1950년 한국전쟁으로 공소 집은 불타 버렸고, 1952년 봄 연화동 24번지[로베르 신부 머물던 곳, 이상우 부지]에 흙벽돌과 기와로 된 20평 한옥 강당을 지었다. 1959년 12월 6일 신동 공소 강당이 마련되자, 허물어진 신나무골 공소 재목을 팔아 수도원에 바치고 신동 공소로 가서 예절을 바쳤다.

근대 순교자와 신나무골 공소

신나무골 공소에 와서 사목을 한 왜관본당 신부들이 순교자 ‘하느님의 종’이 됐다. 왜관성당 2대 카다르(Joseph Cadars, 姜達淳, 1878~1950, 재임 1929~1931), 3대 리샤르(Robert Richard, 李東憲, 1900~1950, 재임 1931~1939), 4대 를뢰(Pierre Leleu, 盧, 1909~1950, 재임 1939~1943) 신부가 순교했다. 코르데스(Marius Cordesse, 孔, 1909~1950) 신부는 리샤르 신부가 요양 간 동안 왜관본당에서 잠시 사목을 했는데 역시 순교했다.
1948년 5월 8일 대전교구가 설립됐고, 대구교구에서 사목을 하던 파리외방전교회 신부들은 거의 다 대전교구로 옮겼다. 새로 생긴 더 어려운 교구를 위해 대구를 떠났다. 1950년 여름, 전쟁이 일어나자 북한 공산군은 13명의 파리외방전교회 신부들을 체포했다. 6명은 대전에서 학살당했고, 죽음의 행진에서 5명이 희생됐으며, 1명만 살아남았다. 리샤르・를뢰・코르데스 신부는 대전 목동성당에서 총살당했고, 카다르 신부는 죽음의 행진에서 선종했다.

신나무골 성지 제1차 개발

1974년 레지날도(Reginaldus Egner, 王默道, 1973~1975) 신부는 신나무골이 신앙의 요람지임을 알고 성지 개발을 시작했다. 왜관수도원 신부들의 봉헌금과 신자들의 부지 봉헌과 협조로 제1차 성지개발을 완수했다. 1977년 7월 11일 신동성당을 주축으로 김구정 선생이 작성한 영남지역 ‘선교 요람지 기념비’를 세웠다.

신나무골 성지 제2차 개발

1982년 신동성당에서 축대 쌓기, 나무 심기, 광장 넓히기 등 성지 확장 공사를 했다. 1983년 로베르 신부의 흉상을 세우고, 1984년 대구의 첫 본당 터를 복원하면서 옛 사제관과 학당, 명상의 집 개축 공사를 했다. 1984년 7월 8일 이선이 엘리사벳의 유해를 칠곡 안양동 산[칠곡IC 뒷산]에서 신나무골로 이장했다.

신나무골 성지 제3차 개발

2015년 대구대교구는 왜관수도원으로부터 성지 관할권을 이관받아 신나무골 성지 개발에 착수했다.
2018년 2월 28일 기공식을 한 후, 8월 9일 성당 상량식을 갖고 십자가형 한옥 성당, 한옥 기와 사제관, 로베르 신부 초가 사제관을 복원했다.
2019년 5월 2일 천주교 대구대교구장 조환길 타대오 대주교가 성지를 축성했다.